카메라의 발명 이후 조형예술을 그 전과 동일할 수 없었다. 예컨대 중요한 실존적 위기를 마주하게 된것이다. 벤야민적 순간 이전의 시각예술은 실재계의 재현에 초점을 두었다. 더 실제와 가까운 재현을 묘사하는 테크닉에 미술의 방점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화가의 역할은 카메라라는, 산업혁명이 낳은 복제 기술에 의해 대체될 위험에 처해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기술복제시대가 시각예술이라는 분야 전체에 존재론적 위기를 불러왔다. 카메라 이후 약 한세기, 조형예술은 그 어느때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매체적, 주제적, 미학적 표현방식으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미니멀리즘, 팝 아트,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사조가 교차하며 나타났지만, 그 시작을 연 것은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추상예술이었다. 카메라를 비롯한 기술적 테크닉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계를 렌즈 속 투영하는 역할에 그쳤지만, 인간의 창의력은 실재계를 왜곡한 형태로 - 몬드리안의 선, 혹은 칸딘스키의 면처럼 - 표현해낼 수 있는 재주가 있었던 셈이다. 예컨대 추상이라 함은 복제기계가 따라할 수 없는 인간만의 특성이자, 인간 사고 고유의 영역이었다. 이런 추상의 가치는, 그러나, 동시대 특유의 교육 시스템과 사회문화적 컨텍스트 속에서 빛을 바래지 못하는 것 같다. 본 책의 10장 모델링에서 언급되듯이 추상화된 시스템/대상을 만나볼 수 있는 가장 흔한 예시는 수학적 모델링이다. 수없이 많은 자연, 사회, 경제적 현상이 수학이라는 추상적인 언어를 빌려 모델링 되어 있으며, 교육과정 속 수학이 가치를 지니게 되는 중요성도 이러한 추상성에 기반한 범용성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학을 처음 접할때 이 추상적인 공식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변환, 적용될지 집중한다기 보다는 추상적인 공식 자체를 유도하고 그 추상성속에서 반복되는 논리구조를 폐쇄적으로 치환하는데 초점을 둔다. 예컨대 ‘공식을 위한 공식’, ‘모델링을 위한 모델링’, ‘연구를 위한 연구’와 같은 지적 유희 과정이 실질 세계와 분리되는 현상이 우리 도처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다. 너무나 세분화되고 local-optimised 된 시스템의 분리된 부분들이 총괄적인 시너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수업시간 중 언급된, 미술 교육과정에서 추상미술을 다루는 방식의 문제도 이에 일맥상통한다. 예컨대 우리는 추상미술이 구체적인 대상에서 추상적인 과정으로 변증적으로 고도화되가는 과정의 이해 없이, 추상화라는 결과물만을 놔두고 ‘따뜻한 추상’, ‘차가운 추상’이라는 그럴싸한 수식어만을 암기하는 교육과정을 거쳤다. 이는, 마찬가지로, 추상의 가치 (더욱 정확히는 추상화하는 과정의 가치 - 혹은 역추상/구체화 하는 과정의 가치)에 초점을 둔다기 보다는 ‘추상을 위한 추상’에 편중되어 초점을 둔 결과 마주하게 되는 비극이다. (혹은 다른 식으로 해석하자면 지식의 주입이라는 local goal에 편중되어 optimisation을 진행한 교육시스템의 비극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백년 전 카메라의 발명이 조형예술을 실존적으로 위협했다면, 이제 동시대 AI의 집약적 발전은 인류를 실존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류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조형예술이 기술의 실존적 위협 속에서 추상화라는 기계가 수행하지 못하는 지적 영역을 발견했듯이, 인류에게는 패턴 처리에 능한 기계의 실존적 위협 속에서 새로운 패턴을 여러 도메인속 엮는 새로운 영역을 탐구해나갈 자유이자 의무가 주어져 있다. 예컨대 기계가 종측 방향으로 사고한다면, 인간은 횡측 방향으로 사고할 역량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교육의 개혁, 사회문화적 컨텍스트의 개혁, 그리고 시스템의 개혁이 수반되어야할 것이다. 백년 전 미술계에서 재현화를 잘 그리던 기술자-화가들은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고, 피카소-뒤샹-말레비치와 같은 사고하는 자들이 새로운 영광의 시대를 열어갔다. 동시대 학계에서 논문을 찍어내는, ‘연구를 위한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들이 자연스럽게 LLM에 의해 대체되고, 기존 정립된 학문 분야를 가로지르며 사고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탐구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인류의 새 역사를 써내려가게 될 것이다. 나는 역사의 어느 편에 서게 될 것인가?
Text written by Jeanyoon Choi
Ⓒ Jeanyoon Choi, 2025